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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종군 심정으로 여수 세계박람회 유치에 힘 보탤 것`
대한민국인물사 소식 관리자 조회: [518]

김충석 전 여수시장
시장재직 4년간 급여 `장애아 보호시설에 기부` 약속 지키고 아름다운 퇴임

“나는 죽는 날까지 기부 행위를 계속할 것이다.” 세계 2위의 부자이자 ‘투자의 귀재’로 알려진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의 ‘나눔의 철학’은 최근 우리 사회에 묵직한 여운을 남겼다. 사회 지도층의 도덕적 의무(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케 한 화두였다.
우리 사회는 기부에 인색하다. 기업들이 ‘회삿돈’으로 생색 내는 일은 있어도, 부자들이 ‘내 돈’은 내놓지 않는다.

그래서 “시장에 당선되면 급여 전액을 장애인 복지사업에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고, 지난달 30일 ‘아름다운 퇴장’을 한 김충석 전 여수시장(65)의 행보는 한층 더 값지게 다가온다.

오랫동안 풀지 못했던 목마름이 다소간 해소된 느낌이었을까? ‘공수표’ 공약을 남발하는 정치 풍토에서 결코 쉽지 않은 약속을 지켜낸 그의 미담이 더없이 흐뭇하다. 하지만 12일 서울서 기자와 만난 그는 담담한 말투로 그 배경을 들려준다.

“정신지체 아동을 둔 어머니들은 자녀를 돌보느라 아무 일도 못해요. 그래서 이 아이들이 함께 있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그곳에서 어머니들이 교대로 돌보면 어떨까 생각을 했어요. 그러면 어머니들도 잠시나마 쉴 수 있고, 자기 생활을 할 수 있잖아요. 그걸 결심하고, 실천에 옮긴 거죠.”

동기는 단순했다. 그러나 한 번 먹은 마음은, 흔들림 없이 ‘힘 있는’ 실천으로 이어졌다. 2002년 여수 시장 취임 이후 지난 4년 간의 그에게 지급된 급여는 총 2억 5,190여 만원. 그러나 그는 일원짜리 하나 만져보지 못했다. “월급 봉투를 받아 본 적이 없으니, 얼마인 줄도 몰라요.”

그랬다. 김 전 시장의 뜻에 따라 취임 이듬해인 2003년 4월 개원한 장애아 보호 시설 ‘사랑이 가득한 집’은 임기 4년간 기부할 돈을 사전에 집행(?)해 나갔다. 1억 9,700여 만원을 미리 은행에서 대출 받아 설립했다. “14~15명의 장애아를 위한 보호 시설인데, 지난해 8월에야 빚을 다 갚았어요.”

`작은 실천이지만 내겐 큰 행복`

은행 부채를 다 탕감한 뒤에는, 무의탁 노인 복지에 눈을 돌렸다. 2005년 9월 이후의 급여 5,400여 만원을 사회복지법인 ‘은현’에 쾌척했다. “어려운 이웃들을 생각하는 작은 계기를 만들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 말 속엔 거창한 철학은 없었지만, 진심이 느껴졌다. 그는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선행의 기본 원칙에 충실한 듯 보였다. 가까운 예로 지난해에는 시장실로 한 젊은이가 아내와 아버지와 함께 은수저 한 벌과 가족 명의로 새긴 감사패를 들고 찾아와 주위를 깜짝 놀라게 한 적이 있다.

그 젊은이는 1994년 조선대 의예과에 합격했으나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의대 등록금을 마련치 못해 어려움을 겪었던 학생이었다. 하지만 김 전 시장으로부터 대학 재학 6년간 매년 800만원씩의 장학금을 지원 받아 무사히 의대 과정을 마치고 어엿한 의사가 됐고, 약사 아내까지 만났다. 이로 인해 “감사의 마음을 전하려고 신혼여행을 다녀오자마자 시장실부터 찾았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뒤늦게 알려진 미담은 김 전 시장을 다시 보게 했다. 그러나 정작 본인에게는 그리 새삼스러운 일도 아닌 듯했다. 1970년대부터 여수지역발전연구소와 여수중ㆍ고등학교 육성회장 등을 맡으며 불우이웃 돕기와 장학사업에 남다른 애정을 기울였던 그였기 때문이다. 더 구체적인 미담 사례를 묻자 뜻밖에도 “한두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 답이 돌아온다.

김 전 시장이 보여준 이 같은 선행은 “사랑이 또 다른 사랑을 낳는다”는 위대한 힘을 증거하기에도 충분하다.

여수에서 뱃길로 92.4km나 떨어진 작은 섬 ‘초도’에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난 김 전 시장은 학창시절, 여느 어촌 출신 학생들이 그러하듯 등록금으로 인해 눈물을 삼켜야 했던 때가 많았다. 여수수산고등학교 1학년 때는 등록금을 못내 학업을 포기했다가 “장래가 유망한 학생”이라며 담임 교사가 교장을 겨우 설득해, 등록금을 면제 받고 학업을 마쳤다.

1959년 경기대 상과에 진학해서는 학보사 주간 교수의 집에 얹혀 살며 끼니를 해결하기도 했다. “힘들었던 시절, 선생님들의 사랑이 오늘의 나를 있게 했다”고 떠올린다.

대학 졸업 후 수산업에 뛰어든 뒤에는 경제적 상황은 좋아졌다. 태풍 같은 자연재해로 하루아침에 어장이 날아가는 등 고비도 있었지만 대체로 사업에는 운이 따랐다. 생활의 기반을 잡으면서 지역봉사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여수청년회의소(JC)와 로타리클럽 활동 경력만 지금까지 30여 년에 달한다.

이에 반해 기실 그는 정치인으로서는 인생의 분량이 적다. 2002년부터 2006년까지 4년간의 여수시장 재직이 그의 정치 이력의 전부다. “선조 중에 정쟁에 휘말려 희생되신 분들이 많았던 탓에 집안에서 정치 입문을 만류했다”고 털어놓는다.



후손들이 살아가야 할 여수를 세계인들로부터 인정 받는 도시로 발전시키는 데 모든 역량을 `올인`했다. 수완 좋은 사업가 출신답게 그는 먼저 발전의 동력이 될 `예산 확보`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인구 규모로 전국에서 61번째에 해당했던 여수의 예산 규모는 전국에서 열 손가락 안으로 진입했다.


그래서 2002년 6.13 지방선거에 시장 후보로 나설 당시 그는 “정치라기보다 ‘행정’이자 ‘봉사’로 생각하고 참여했다”고 밝힌다. “서울병무청에서 군대생활을 했다”는 김 전 시장은 군에서 익힌 행정의 기초와 대학과 사업에서 닦은 경영마인드, 그리고 지역 봉사활동의 경험이 자신감을 줬다고 한다. “지역봉사활동을 조금 더 넓은 장에서 펼쳐보고 싶었던 거죠.”

시장시절의 그는 특이하게도 언론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지난 4년간 “기자들과 식사를 함께 한 적은 딱 네 번뿐”이라고 말한다. 그것도 앞의 세 번은 기자간담회를 통한 점심 식사 자리였고, 허심탄회하게 기자들과 저녁 겸 반주도 같이 한 것은 퇴임 직전 단 한 번밖에 없다고 했다.

“동서고금 역사를 막론하고 누군들 관직에 처음 나갔을 때 ‘잘 하려고’ 마음 먹지 않겠어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다 보면 나태해지고 흐트러지기 쉽잖아요.” 이를 막아줄 견제 대상이 필요하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언론이 시정에 대해 예리하게 비판해주길 바랬어요. 그래서 일부러 멀리했죠.”

제2 여수 부흥 초석 다진 4년

“세계로 웅비하는 미항 여수”는 그가 시장으로서 내걸었던 발전 청사진이었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그리고 후손들이 살아가야 할 여수를 세계인들로부터 인정 받는 도시로 발전시키는 데 모든 역량을 ‘올인’했다.

수완 좋은 사업가 출신답게 그는 먼저 발전의 동력이 될 ‘예산 확보’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인구 규모로 전국에서 61번째에 해당했던 여수의 예산 규모는 전국에서 열 손가락 안으로 진입했다. 2004년과 2005년에는 연속으로 한국지방자치연구원의 지방자치경쟁력지수 조사에서 최우수기관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투자 유치 사업과 정부 부처 설득이 유효했다”고 비결을 밝혔다.

그러나 영광만큼, 상처도 많았다. 특히 “정치에 환멸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지난 5.31 지방선거를 앞두고 3월 여수MBC가 여론조사기관 서울마케팅리서치에 의뢰한 결과에 의하면, 여수시장 선호도 조사에서 김 전 시장은 33.2%로 1위를 차지했다. 2위(18%)와의 격차도 두 배 가까이나 났다. 민심이 그를 지지했다는 얘기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민주당 공천을 받지 못했다. 시민들에 의한 공정한 재심판은 받아보지도 못한 것이다. “벌여놓은 사업들을 채 마무리하지 못하고 떠나는 것이 못내 아쉬운 부분입니다.”

‘2012 여수세계박람회 유치’는 시장시절 자나깨나 그가 항시 부르짖던 시의 최대 숙원 사업이었다. 10조 8,000억원의 생산유발 효과, 5조 4,000억원의 부가가치 창출 등 ‘제 2의 여수 부흥’을 이끌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설사 시장자리를 물러났다고 해도 ‘여수 토박이’인 그와 어찌 무관한 일이 될 수 있을까. 그의 남은 생에서 꼭 이루고 싶은 꿈(계획)이 있냐고 묻자, 김 전 시장은 주저 없이 ‘2012 여수세계박람회 유치’라고 말한다. “여수가 잘 되는 것이 곧 제가 잘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시장에서, 시민으로 돌아간 그의 또 다른 날들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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